[ Finger tapping. : 겨울 : 잔재 ]


 

조수석에서 자다 깬 엄마는 왜 이렇게 불편한 길을 돌아가는 거냐고 물었고 아빠는 수경이 예쁜 풍경 오래 보라고 했다. 화면 속 자꾸 웃는 나를 보고 엄마는 그냥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했다. 이번 겨울은 소원을 준비 못 해 눈 오는 창 밖을 애써 모른 척했는데 오늘은 눈길도 걸어보고 나뭇가지도 흔들어봤다. 일부러 겨울바람을 맞으려 산책도 했다. 


 여전히 홀로 걸어가는 것에 가장 큰 안정감을 느끼지만 돌아보면 혼자 이뤄낸 건 아무것도 없다. 조건 없는 사랑과 묵묵한 응원으로 살아간다. 가히 영광스럽고 귀중한 날들.



[ 빛 위에 빛 : 허무로 가는 길 ( empty ) ] 


올해 초 작업 환경에 변화를 겪고 나서는 자정이 다 되어서야 작업복을 입어 볼 수 있었다. 빛이 사라진 검은 방으로 들어설 때면 계단 옆 창에 비친 내 그림자가 제일 무서웠다. 공포로 다가오던 감각에 조금씩 익숙해질 즈음, 비워져 있던 하얀 인화지는 서서히 자연이 만들어낸 질감을 띄우고,빛의 형상을 따라 자리를 채워 가며 잠상 속 세계에 충실히 의존한다.

허공에 무수한 점을 그려 가며 어둠 속에서 빛을 수집하고, 과정조차 눈으로 볼 수 없는 작업 방식은 때때로 깊은 허무에 빠지게 했다. 한참을 엎드려 쌓은 점을 다시 검게 태우기로 마음먹을 때면 눈을 오래 감는다.한 번 지워진 이미지는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색 중 가장 어두운 색으로 욕심을 버리고 생각을 비우는 법을 배운다. 태우기 전 가슴을 저리게 하던 작은 점과 선들은 사라지고, 완성된 검은 종이만 남아 있다. 작은 스크래치마저도 특별하고 선명하게 만들어버리는 색. 아끼지 않을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겨우 걷고 가끔씩 하늘을 보는 일. 검은 종이를 대하는 마음으로 스스로의 삶을 마주할 수 있다면, 허무로 가는 길을 여전히 연습하고 있다.

[ ‘Note from a night walker’]


기다리는 밤 : 노란 양말을 신은 아이 

6호선의 끝자락, 볼살이 통통하게 오른 아이가 발목까지 오는 노란 양말을 신고 있다. 여린 살이 시릴까 두꺼운 바지 위로 한참을 덮어 올린 양말은 부모의 마음이겠지. 한 손에는 토끼 인형을, 반대쪽 어깨에는 서로를 기댄 젊은 부부가 한참을 서서 간다. 치열한 삶이 오가는 지하철 속에서도 섬세한 사랑은 눈에 띈다. 분주한 오후를 보내고, 기다리던 밤이 찾아오면 잠수해 있던 기억 속 풍경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토양과 시간의 흐름 : 땅굴 속으로 어둠을 숨기고

물론 소란한 하루 속 다정함을 발견하는 일이 한없이 멀게 느껴지는 날도 있다. 어떤 날은 습한 비가 내리기도 하고, 굳은 긴장감으로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건조한 땅이 메마르듯, 좁고 깊은 동굴로 걸어가는 기분이 드는 날이면, 작은 생명들이 모여 있는 청명한 숲을 떠올린다. 비를 기다리던 땅이 시간이 흘러 새로운 생명의 뿌리가 되듯,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고요의 시간에 집중하다 보면, 경직되어 있던 손은 정돈된 흐름으로, 자유로운 움직임을 지나 비움과 평온의 감각으로 찾아온다.

[ ‘Note from a night walker’]


[ Finger tapping. : 어쩔 수 없는 일 / 물의 도움으로 흔들리는 나무]   


딱 떨어지는 수평 이미지에만 안도하던 사람이 결과도 모를 작업을 하게 되다니. 알 수 없는 삶이다. 아직도 5미리 간격에 가슴을 쓸어 내리지만 이왕 시작했으니 이젠 어쩔 수 없다. 

유난히 희고 맑은 계절이 온다. 계절과 함께 옮겨가지 못한 꽃잎들, 잔잔하게 흐르던 물결의 파동을 기억한다. 나에게는 그것들을 천천히 들여다봐야 할 의무가 아직은 있다. 기계의 선명함을 담은 재현적 이미지를 담아내지 못할지라도 최소한의 긴장만을  유지한 채 내가 가꾸어 온 세계에 책임을 다하는 태도로 살아가고 싶다.

[ ‘Note from a night walker’]


[ Finger tapping. : 두부처럼 여린 마음 ]


잘 보이고 싶어 반듯하게 다린 셔츠가 구겨질까, 허리 한 번 굽히지 못하고 6시간씩 버스를 타던 날들이 있었다. 모든 감각이 낯설었던 그 해의 푸른 여름날을 닮은 고명재 작가의 글 (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_ 안개꽃 ) 은 정체되어 있던 마음을 다시 움직이게 하고 싶은 용기를 준다.서늘한 이야기 속 아이와 여자의 사랑이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책 속에 쓰인 표현의 일부를 온전히 느껴보고 싶다.

 (_ 스치면 사라지는 하얗고 맑은 두부를 재료로 삼아 표면이 반짝이는 미색 (美色) 중성지 위에 기억에 따라 그려냄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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